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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실패의 역사 – 한준탁 (미디어 활동가)

기사입력 2023.06.1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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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준탁.png
    <탁튜브 베트남> 캡쳐

     기고를 보내준 한준탁 님은 현재 부천시청년정책협의체 위원장과 경기콘텐츠진흥원 매니저, 팟캐스트<부천오원소>, 유튜브 <탁튜브 베트남>을 운영중이다

    음악을 사랑하고, 자칭 보헤미안인 그는 젊은 세대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청년세대의 취업과 창업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의 고민들에 더해 이 글을 쓰기 위해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니 20대의 나는 돈을 버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돈 버는 일 자체를 무시하듯 거부하고 기타를 매고 수염을 기르며 홍대를 서성이는 한량, 백수, 자칭 보헤미안으로 20대를 보냈다. 그래서 뮤지션으로 성공했냐고 물어본다면 전혀 아니다.

     

    유명해지고 싶었고, 30대가 되기 전에 로큰롤 스타가 되어 그래미 어워드에서 상도 타고 수영장 딸린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지만 전혀 아니다.

     

    청년 세대의 취·창업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한량 얘기를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 글을 쓰기위해 돌아본 나의 실패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밴드를 만들어서 오디션을 보고 무대에도 서고 지방 공연도 다니고 조금씩 이름을 알리려 하던 그때 축가를 하러 간 결혼식에서 사고가 났다.

    멤버 중 한명은 이가 부러지고 나도 얼굴에 큰 상처가 나서 피부과 진료를 받아야했다. 그 상태로 무대에 오를 수도 업어 모든 공연과 섭외 됐던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만 했다. 밴드는 하루 아침에 해체되고 멤버들은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나의 밴드 생활도 끝났다.

     

    서른살이 됐을 때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장사를 시작했다.

    스포츠 브랜드 매장에 매출 수수료를 받는 중간관리 점장으로 들어가서 일을 했는데 들어가려면 보증금이 필요했다 20대를 한량으로 보낸 나에게 그 큰돈이 있을 리 없었다. 신용도 좋지 않아 무려 금리 23%짜리 대출을 받았다.

     

    오픈하고 초반 매출은 괜찮았다. 괜찮은 걸 넘어서서 꽤 벌었다. 그러다 본사와의 갈등으로 망했다. 직원들 월급 주면 잔고는 바닥이었고 나는 생활비를 빌리러 창고에 들어가 주변에 연락을 돌리기 바빴다. 결국 그러다 폐업을 했고 자취방은 월세를 못 내서 돌려받을 보증금도 없었고 용달차 하나 불러서 남은 짐만 싣고 부모님이 사시는 집으로 돌아갔다. 처참했다. 남은 건 빚, 앞으로 내야할 세금들 그리고 원망과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리고 또! 장사를 시작했다. 또 망했다.

     

     두 번째 폐업을 하고 세무사 상담을 받아 세금은 잘 정리를 하고 남은 빚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단기간에 돈을 벌고 싶어서 건설현장을 찾았고 목수 일을 시작했다. 건설기능학교에서 한 달간 교육을 받고 만 2년을 일해서 대출금을 갚았다. 일당도 많이 오르고 기능공이 되어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건설근로자로 열심히 지내며 팟캐스트에 빠져있었는데 어느날 내 방송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는 생각이 들어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소재를 찾던 중 마을미디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평일엔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주말엔 팟캐스트 녹음을 하며 이중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시작한 마을미디어 방송은 반응도 좋고 인정도 받아 연말에 상도 타고 조회수도 높아 조금씩 조금씩 이름을 알려가고 있었는데 그러다 현장에서 사고가 났다.

     

    한겨울 아파트 옥상에서 지붕을 만들기 위해 목재를 날라 지붕 위에서 일을 하다가 꽁꽁 언 목재가 손으로 떨어져 엄지손가락이 골절됐다. 그 후 산재를 두고 산재 대신 합의하자는 직영 업체와 다투기 시작했는데 돈은 받지 못하고 직장도 구하지 못한 체 병원 다니며 다시 백수생활이 시작 됐다. 결국 합의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고 1월에 다친 상처로 5월이 되어서야 합의했다.

     

    그 돈으로 코인을 했다.

     

    글을 보면서 한숨을 쉬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결과가 비극적이진 않았다. 조금의 수익을 보고 모든 코인을 정리했다. 그 돈으로 근근히 버티며 살다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 지금 하고 싶은 게 뭐야?” 돈 버는 건 여전히 재미없고, 음악은 어차피 평생 할 거니까 미뤄두고 지금 가슴 뛰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방송이었다. 팟캐스트 제작과 마을미디어 활동! 그래서 다 정리하고 미디어 활동가로 살기로 마음 먹고 내가 활동하던 지역의 미디어센터에서 시민PD1년동안 활동했고 그 다음해에 경기도에서 활동하는 마을미디어 활동가들의 콘텐츠를 공중파 라디오에 송출하는 도민PD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처음 봤을 땐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나는 충북 충주에서 모텔에서 장기투숙 하며 화장품 공장에서 생산직 야간 근무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넣었는데 합격했고 지금의 직장이 바로 그 일이다.

     

    작년 한 해 동안 81개의 지역 미디어센터 마을미디어 콘텐츠를 공중파 라디오에 송출했다. 나의 실패의 역사속 어느 순간이든 누군가 나타나서 너는 도민PD가 될 것이고 공중파 라디오를 제작하게 될거야라고 한다면 사기꾼으로 신고를 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19년 처음 마을미디어를 시작하는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 대도 손사레를 칠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을 실패의 역사라고 한 것은 실패의 경험에서 오는 교훈 같은 그런 고루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패라는 것이 각자에게 주는 의미가 다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누군가에겐 주저 앉을 데미지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극복하고 이겨낼 또 다른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칼로 물 베듯 아무일도 아닐 수 있다.

     

    나에겐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일을 할 자양분이었고 돌아보면 지그재그였지만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의 이 일도 언제 또 다른 시련으로 망할지, 실패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나는 그것이 두렵거나 지금의 일을 잃을까 겁먹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나는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이유는 결국 실패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것에 목적이 있다. 나는 내일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또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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